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순왕후(조선 영조) (문단 편집) == 여담 == * 정순왕후 시대에 가장 부정적으로 거론되는 사건은 혹관 이여절의 처리에 있었다. 이여절은 일종의 법비에 가까운 인물로 [[정조(조선)|정조]] 시절 가혹한 혹정으로 인해 장살자를 25명이나 만들었지만 공적인 처벌이었다는 이유로 귀양에 그친 인물이었다. 이여절은 이후 복직되었으나 그 행태가 변하지 않았는데 [[신유박해]] 와중에 [[함경남도]] [[장진군|장진]]부사로 있으면서 황씨 성을 가진 [[천주교]]인을 물고하여 [[황사영]]이라고 거짓자백하게 만든 다음 거짓으로 "황사영을 잡았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진짜 황사영은 [[충청북도]] [[제천시|제천]]에서 잡혔으며, 조정은 함경감사를 보내 이여절의 악질적인 행보를 파악하고야 만다. 이여절은 공무상 과실치사죄, 허위보고죄, 기군망상죄 등 중죄를 1번이 아니라 2번이나 저지른 재범으로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는 [[사형]]감이었다. 정순왕후마저 격노하여 "참으로 기가 막힌다"며 이여절을 사형시키려고 했으나, [[심환지]]가 "공무상 죄니 사형은 곤란하다"며 반대하였다. 심환지가 정조 년간에 이여절에 대해 처음 접했을 때는 사형을 주장하였던 것을 고려하면 [[신유박해]] 와중이라는 시점이 고려되었을 수도 있다. 정순왕후는 "이 이여절이라는 자는 무도한 탐관오리로 팽아(삶아 죽이는 형벌)의 죄도 부족한데, 무고하고 가엾은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며 "영상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평생 충군하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여기에는 이여절이 평소에는 일처리도 시원시원하고 공정하고 유능하다는 평판의 문제도 있었다. 단순한 탐관오리가 아닌 지능형 강약약강에 지방관의 사법권을 최대한 활용하여 물고를 내 실적을 올리는 스타일의 미꾸라지 법비였던 이여절은 결국 이번에도 살아남아 절도에 충군 후에도 큰 공을 세워 복직되었고, [[전라북도]] [[전주시|전주]]부윤을 거쳐 순조 10년에는 전라좌수사까지 되었다. 정조 역시 이여절을 살려주었다는 점을 보면, 정순왕후의 판결은 아쉽기는 하지만 수령에게 사법권을 주는 [[왕조]] 자체의 맹점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 [[야사(역사)|야사]]에는 간택 당시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꽃]]이 무엇이냐"고 묻자 규수들이 모두 [[장미]], [[모란]] 같은 꽃을 언급할 때 "백성을 따뜻하게 하는 [[목화]]꽃이 가장 좋다"고 대답했고, "가장 넘기 힘든 고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보릿고개]]라고 답해 정순왕후가 [[왕비]]로 간택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소금]]이라고 대답하고 "가장 깊은 것은 바다, 강, 뒷동네 연못 등이 아닌 [[사람]]의 마음"이라고 대답하는 2가지 질답이 추가되기도 한다. 또한 간택 후보들이 앉을 방석에 후보들 아버지의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정순왕후는 여기에 앉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임금]]이 이유를 묻자 "어찌 딸 된 자가 제 아비의 이름을 깔고 앉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는 [[야사(역사)|야사]]와 이날 마침 비가 내리자 "궁궐의 행랑 수가 얼마인지를 알아보라"는 질문을 하자 다른 규수들은 모두들 당황하면서 궁궐 지붕을 쳐다보기 시작했지만 홀로 머리를 내리고 침묵하자 [[영조]]가 "어찌하여 머리를 내리고 있느냐"고 묻자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면 행랑의 수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 정순왕후가 태어날 당시의 이야기에는 부친인 김한구가 아내를 [[가마(탈것)|가마]]에 태우고 친정으로 가고 있었는데, 눈으로 덮힌 벌판 한가운데서 아내가 출산하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이사관이라는 [[선비]]가 자신이 입고 있던 털옷을 부인에게 내어주고 김한구와 같이 가마를 끌고 가장 가까운 마을로 가서 손수 [[쌀]]과 [[미역]]을 사주며 해산 구완을 해 주었다. 이 때 태어난 정순왕후는 [[왕비]]로 등극한 뒤에 영조에게 얘기해주었고, 영조는 이사관을 승진시켜 [[정승]] 자리에 앉혔다.[* 이사관은 [[영조]] 때의 실존 인물이다.] * 입궐 초기에는 [[궁녀]]들이 뒷면의 옷 치수를 재려고 무심코 "돌아서 주시옵소서"라고 했더니 "네가 돌아가면 될 것을 감히 누구보고 뒤돌라 하느냐"하며 호통을 쳐 [[궁녀|궁인]]들이 벌벌 떨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 정순왕후는 [[영조]]의 [[왕비|계비]]로 입궁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인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오늘날의 [[중학교]] 2학년인 15세(만 13~14세)였다.[* 사실 강상의 도리에 따라 당연히 이렇게 행동, 또는 이와 비슷하게 행동했어야 맞다. 부원군들이 친딸이라도 왕비에게는 꼬박꼬박 존대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한참 후대의 인물인 덕혜옹주도 어린 나이부터 자신의 외삼촌을 단순히 '양 상관'이라 부르며 하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